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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역사

by 물고기대마왕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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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역사

영화는 짧은 기간이나마 부단히 자신의 기술을 개혁해 왔고 자신의 표현방법을 개발해 왔다 . 뤼미에르 형제가 1895 년 그들의 시네마토그래프를 공개상연한 것을 시발점으로 , 사실 ( 事實 ) 을 동적으로 기록하는 하나의 진귀한 ‘ 눈요기 였던 원시적인 활동사진시대를 거쳐 , 실험영화를 만들고 , 다시 그것은 무성 영화시대에서 유성 영화시대로 , 색채 영화시대로 , 그리고 대형 영화시대로 발전해 왔다

 

영화의 표현 방법의 역사

한 개의 장면을 고정촬영한 원시표현형태에서 클로즈업 수법이 구사되었고 , 급기야 1915 년 그리피스의 《 국가의 탄생 》 이 발표되었을 때는 원경 (L.S.), 대사 (C.U.) 등을 이용하여 몽타주의 원리를 보여주어 , 영화형식을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시켜 갔다. 1920 년대 미국의 ‘ 사일런트 코미디 와 유럽의 ‘ 아방가르드 , 독일의 표현주의와 러시아의 몽타주 이론의 개발을 거친 영화 미디어의 변모는 1927 년 유성 영화의 창시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 네오 리얼리즘 (1943 ~ 1952), 프랑스의 ‘ 누벨 바그 와 ‘ 시네마 베리테 (1959 ~ 1963) 에 이어 오늘날 순수 독립영화파와 ‘ 뉴 아메리칸 시네마 로 이어지는 급격하고 다양한 변모를 겪어 왔다 . 즉 , 영화만이 지닌 독특한 표현수단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여 스펙터클 영화 , 다큐멘터리 영화 , 네오 리얼리즘 그리고 누벨 바그나 언더그라운드필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자신의 표현수단을 개혁해 왔던 것이다 .

 

영화의 탄생

1895 년 12 월 28 일 ,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 (Cinematographe) 를 공개하였다 . 이듬 해 3 월 22 일 렌가 ( 街 ) 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 열차의 도착 》 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 ( 試寫 ) 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었다 .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장치가 고안되어 있었다 . 즉 , 1889 년에는 미국의 발명왕인 에디슨이 키네토스코프 (kinetoscope) 를 발명했다 . 원래 이것은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볼 수 없도록 된 , 들여다 보는 식의 기계였는데 , 이것을 스크린에 비추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려는 연구가 여기저기서 행해졌다 . 미국에서는 토머스 아매트와 프랜시스 젱킨스가 바이타스코프 (Vitascope) 와 판타스코프 (Phantascope) 를 발명하였고 , 독일에선 스클라다노프스키가 비오스코프 (Bioskop) 를 , 오스카 메스커의 비오폰 (Bio­phon) 을 발명하였고 , 영국에서는 윌리엄 폴이 애니마토그래프를 발명했다 . 그리고 1896 년에는 에디슨도 바이타스코프를 발표했고 ,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도 그와 같은 것이 소개되었다 . 그 중에는 색깔을 나타내거나 소리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이 움직이도록 만든 것은 모두 공통적이었다 . 더구나 이 장치들이 서로 아무런 관계 없이 개별적으로 각자의 나라에서 고안되고 공개되었다는 것이 다른 발명과 다른 점일 것이다 . 말하자면 영화의 발명은 사진에 의한 화상의 기록이나 분해사진 ( 分解寫眞 ) 에 의한 움직임의 재현이며 , 셀룰로이드 필름에 의한 장시간의 투영 등 필요한 원리와 재료가 이 무렵에 이미 고안되어 있어서 , 이것들을 짜맞추기만 하면 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 따라서 영화는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 시대의 발명이라는 것이 옳은 말이다 . 그럼에도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로 영화를 대표케 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기술적으로 잘 되어 있었고 , 흥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어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었기 때문이다 .

 

결국 이렇게 보면 현대예술의 총아인 영화는 19 세기의 마지막 한밤중에서 20 세기의 첫새벽에 걸치는 사이 근대의 과학속에서 잉태하여 태어났다 . 동시에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등 각국에서 거의 동시에 태어난 영화는 그 후 불과 4-5 년 안에 전 세계의 각지로 퍼지게 되어 영화는 20 세기의 예술로서 눈부신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

미국영화도 전후에 들어와 할리우드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시네 도큐망 소시얼’이라고 불리는 TV출신의 신인들이 괄목할 만한 활약을 시작했다. 특히 미국에서 유럽 아방가르드에 이어 그 전위적 정신이 언더그라운드 영화, 엑스퍼리멘탈 영화에 계승되었고, 그 중에서도 극영화로 표출된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경향으로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영화예술의 첨단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삶과 본능, 그리고 모순을 이들만큼 정직하고 대담하게 그리는 영화작가들은 없을 것이다. 근래의 작품으로는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니컬스의 《졸업》, 넬슨의 《솔저 블루》,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 등등이 이러한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다. 이 밖에 영국에서는 영국은 린(《밀회》), 리드(《제3의 사나이》) 등 역작(力作)감독들이 활약했고, 한때 프리 시네마’ 운동이 일어나 활력을 보이는가 했으나 리처드 크레이톤이나 리처드슨 등이 몇 개의 작품을 냈고, 카렐 라이스와 존 실레딩거 등이 활약하고 있다. 또 유럽에서는 앞서 열거한 나라들 외에 폴란드, 스웨덴 등에서도 유망한 작품을 낳아, 각기 국민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작풍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각국의 영화조류(映畵潮流)나 경향을 따라서 본 것 이외에 세계적인 거장들이 활약한 점이다. 카잔(미국), 베리만(스웨덴), 리드(영국), 클레망(프랑스), 구로사와(일본), 히치콕(미국) 등 결코 적지 않다. 끝으로 이러한 전후의 세계영화를 개관할 때 역시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에 본격화한 TV시대에 마주선 영화는 고된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련에 대항해서 영화는 색채와 대형화면(隊形畵面)을 수없이 만들었다. 52년에 만든 시네마스코프 《성의(聖衣)》를 비롯해 《비스타비전 토드-AO》(1958), 70밀리 화면의 스크린(《남태평양》, 1961), 이 밖에 입체영화도 시도했다. 그러나 일단 시련의 바람을 안은 영화는 앞에서 본 전후 각국의 전위적 움직임과 함께 격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 즉 영화의 예술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다시 구축해야 할 계제에 놓인 것이다. 안이한 기업성에 입각한 영화산업은 변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지금 360도 화면의 영화, 확대 영화(expanded cinema), 멀티 화면, 환경 영화(環境映畵, environment cinema)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매체의 발달은 영화의 위력을 보다 더 넓고 깊게 인간의 문화에 근원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계 각국간에 완성 작품은 물론, 제작 단계에서도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이에 따라 영화는 더욱 더 문화적인 역할을 더해가고 있는 것과 더불어 국제교류가 도리어 영화에 반영되는 등 각국의 개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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